안산에 관한 작업을 마무리 한 소회
Mine impressions about my Ansan-themed artwork.
최근에 나는 안산을 테마로 했었던 작업의 마지막 부분을 마무리 했다. 이 작업을 진행한 시간은 내게 유독 특별한 감상을 남겼고, 그렇기에 이렇게 이 마음을 남긴다.
최초에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던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로는 Covid-19로 인해 여행이 제한된(혹은 스스로 자제하게된) 상황에서 기존의 “주관적인 풍경”시리즈를 지속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는 것,
두번째로는 내 작업이 지역적인 특색을 띈다는 부분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풍경이 있을 것 이라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 싶었다는 욕구가 되겠다.
2020년 12월에 계획되어 있는 기획전(내가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하게 된 이유라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기획전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에는 기존의 작업을 지속하는 것을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상기 했듯이, 코로나로 인해 작업을 위한 여행을 진행하기에는 불안감이 컷다. 이에 나는 내 작업실이 있는 안산이라는 지역에 좀더 집중 하기로 했다.
최초의 계획은 이랬다. <안산에 거주하고 있고 예술문화에 관심이 있는 6~10명 사이의 인원을 섭외하고 이후 대면 인터뷰를 진행,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가진 안산에 대한 풍경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주관적인 풍경’의 양식으로 남긴다.>
나는 이 과정을 안산시 소속의 기관과 함께 하길 바랬고 이에 열심히 전화를 돌렸다. 거의 마지막에 안산문화원 이란 기관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안산 향토문화에 관한 연구, 공개를 지속하고 있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를 열고 있는 곳이다. 최초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당시 한국의 코로나 상황이 좋았고 당시 안산문화원은 다음주부터 진행될 교육의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던 상황이였다. 안산문화원에서는 현재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내 의도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음주부터 진행될 교육의 수강생들에게 언질까지는 해줄수 있으니 교육이 끝난뒤에 와서 직접 홍보, 진행하라까지 이야기가되었다.
다만 이 이야기가 마무리 된 당일 9시 뉴스가 제일사랑교회발 대규모 코로나 감염사태가 발생 하였을음 알렸다. 아직도 매우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를 뉴스로 접한 이후로 안산문화원에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안봐도 유튜브 인걸. 물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안산의 기관을 통해 인터뷰 대상자를 구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 했다. 1안을 폐기한다면 2안으로 이행해야겠지, 나는 이 과정에서 한달의 시간을 소모했다.
이후의 나는 별수없이 지인을 통해 인터뷰 대상자를 모집했다.
내게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인터뷰 대상자는 6명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인터뷰 대상자는 뭉뚱그려서 이야기 하자면 친구의 친구였다.
여차저차 사람들을 섭외했고, 그들에게 내 상황과 작업 방향을 설명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뒤 사전 질문지를 이메일로 발송 했다. 이 과정에서 대면 인터뷰는 전화인터뷰로 바뀌게 되었다. 섭외된 6명의 안산 거주민 중 오직 1명만 대면인터뷰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인터뷰는 메일 발송일 이후 한주 뒤에 그들이 괜찮다고 이야기 한 시간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우선 내가 가진 안산의 풍경을 두점 제작하기로 했다.
결과론 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내가 가진 안산의 이미지는 내 작업실과 근처에서 장을 보던 곳, 관광지라 다양하게 존재하던 여러 음식점에 대한 감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아무렴 어때, 내 이야기가 담긴 작업을 진행 하는 동안 인터뷰를 진행 하기로 한 시간이 되었고, 드디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남궁효은씨였다. 그녀는 친구의 친구로서 소개를 받았지만, 초등학교 시절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졸업동기이기도 했다.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남궁효은씨는 안산시 월피동에서 14년 거주했고, 근처 광덕시장의 자수 공방에서 프랑스 자수를 가르키는 강사로 일을 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수원으로 이사했다.. 현 거주지에서 광덕시장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는 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남궁효은씨는 원래 안양시에서 거주하다가 집의 이사로 19살에 처음으로 안산으로 이주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정서적인 부분에서 답답함을 느꼇다고 한다. 하지만 안산 주도의 지역 프로그램들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 동생들이 생겼고, 나름 안정감을 얻을수 있다고 했다. 안산과 관련한 농담을 소개해줬는데, “안산엔 안산다, 안산다 하다가 다 살게 된다.”라고 하면서 정말 그랬다고 웃었다. 19살에 안산에 와서 20대를 보냈고, 20대에 혼인한 후 그곳에서 신혼생활을 지내면서 강렬한 희노애락을 경험 했다고 한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화성은 약 5개월째 지내고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왕래가 어렵고, 뭘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안산이 아련하게 남는다며 인터뷰가 마무리 되었다.
두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박인아씨였다. 이분은 남궁효은씨의 소개로 연락이 닿게 되었다.
박인아씨는 안산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분에게는 특히나 광덕시장이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덕시장에 위치해 있던 할머니 댁에서 태어나서, 지금도 여전히 그 근처인 월피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 또한 현재의 광덕시장의 자수공방을 운영한다고 한다.
이것은 본인에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감회가 서려 있다”고 했다.
완전 시골이였던 안산이 개발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고, 본인의 아이-딸만 넷이라고 한다-또한 그 자리에서 키워왔고, 그렇기에 애착이 간다고 한다. 본인에게는 정말 좋은 곳이라 말하며 인터뷰가 마무리 되었다.
세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신원철 씨였다. 신원철씨는 60대의 나이로 현재 반월공단에서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회사 대표다. 학교를 서울에서 나왔고 대학 졸업 후 직장이 안산이었고, 이후 30세때쯤 안산에 이주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내 어머니의 친구분이시다.
그와의 인터뷰는 좀 길긴 했지만 요약하자면 그가 한국의 흔한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 일했고, 퇴직 후 첫 사업은 실패했고, 어딘가의 연구소에 들어가 다시 월급쟁이로 일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그렇게 준비하여 현재 10년째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자식이 둘 있는데 별다른 설명을 듣기엔 시간이 부족했고-그의 인생사를 듣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이벤트로는 자제분이 초등학교때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를 했고 그 캠프에 참여했다 정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이후로는 일이 훨씬 바빠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2021년에 결혼 날짜가 잡힌 아들의 예를 들면서, 안산은 고향보다 오래 산 곳이지만, 고향같지는 않다고 이야기 했다. 아들 또한 결혼 후 평촌에 신혼집을 차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산은 그냥 지금 사는 곳이지 평생 있을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이것이 산업공단이 밀집된 형태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삶의 과정에서 서로 교차되는 곳이 안산이고, 정들만 하면 누군가는 다른 곳으로 떠나 있기 때문에,
정을 붙이기 어렵다고 했다. 이렇게 인터뷰가 마무리 되었다.
이민경씨는 현재 이동에서 살고있고, 중학교때 이사와서 25년째 거주하고있는 학원의 원장, 문화센터의 강사이자, 본인의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친한 작가를 통해 소개받게 되었다.
중앙역을 중심으로-실재로 중앙역을 이용하진 않지만-삶의 반경이 루틴화 되어있고, 안산시민이라기 보단 여행자의 기분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루틴의 이유로는 학원을 오래 운영한 탓에, 안산 어디를 가도 아는 학부모를 만나게 되어 가는곳만 다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신은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기 때문에, 안산이 아니더라도 본인의 삶은 비슷했을 것이라 이야기 하며 인터뷰가 마무리 되었다.
전규호씨는 원래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에서 거주 했다가 3년전에 이주 했다고 했다. 용산쪽에 있는 인테리어 회사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고 자차로 통근을 한다고 했다. 얘기를 듣다보니 와이프분이 본디 안산 주민이였고, 혼인 후에 집값 관련한 문제로, 안산으로 이사온듯 했다. 본인의 직장도, 친구도 전부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산에서의 삶은 적적하지 않을까 걱정 하였지만, 다행히 와이프분의 친구 부부들과 시간을 자주 보냈다고 했다.
이 부부는 원래 여행을 좋아했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현재 일이 아니면 집에 있는다고 했다. 더욱이 와이프 분께셔 현재 임신중이시라 더욱 조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안산에 살아보니 서울보다 살기는 좋다고 느꼇다 했다. 안산역 근처만 피한다면 차도 많지 않고 재해와 관련된 부분에서 서울보다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인터뷰가 마무리 되었다.
김명기씨는 안산엔 2016년부터 거주하였다. 밴드 명기라는 팀을 이끌고 있는 뮤지션이며, 이 외에도 보컬 트레이너로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적인 믿음이 강해보였는데, 본디 안산의 동산교회에서 믿음을 지속하다가, 본인의 기술을 좋은곳에 쓰고싶어 봉사활동을 위해 수원의 교회로 옮겼다고 한다. 그의 직장은 안양과 서울에 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본인이 안산에서 살 것이란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그는 안산으로의 이주가 자신의 인생 2막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며 인터뷰가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총 6명의 인터뷰가 끝났다. 이후 나는 녹음된 전화인터뷰 내용을 계속 들으며 통화내용의 스크립트를 만들었고, 그들과 관련한 안산의 배경·장소들을 기록했다. 정리가 끝난 뒤 직접 기록된 장소를 방문했고, 그 주변을 산책한면서 그들과의 대화를 생각고, 장소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전화로 진행된 인터뷰 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얼굴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내게 가까이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이 내게 일부 녹아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최초에 이 작업을 기획 하면서 나는, “내가 가진 나만의 풍경있고, 너 또한 너만의 풍경이 있다.”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위 과정을 통해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기묘한 일체감을 느꼇다. 그들의 삶과 내 삶이 교차했고, 그들은 어땟는지 모르겠지만(인터뷰 중에 나는 주로 물어보는 쪽이였고,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들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굉장히 복잡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작업으로 어렴풋이 재현해본 그들만의 풍경에 직접 방문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풍경이 내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재로 그들의 장소를 방문했으니 경험적으로도 내 일부가 된게 맞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걸.
이와 같은 원인으로 나는 처음 계획에 없었던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나와 인터뷰한 6명, 총 7명의 경험이 하나의 화면으로 표현할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안산’이란 제목은 이렇게 나왔다. 하지만 이제 나의 안산, 나만의 안산이기도 하다.
‘우리의 안산’은 코로나라는 변수로 인해 모색해야 했던 대안이 나름의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이 스스로에게 신선하고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과정은 타자를 통해 발걸음을 지속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도착하지 못할 도착지를 향해 끊임없이 여정을 계속 할 것이고, 중간 중간 서로 얽혀가며 각자의 서사를 유지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가치는 각자의 과정에 있지 않을까?
끝.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