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에 관하여

내 기억에 남아있는 곳 고향 목감동은 최소한의 인프라만 간신히 갖춘 곳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생활은 생필품을 비싸게 판다는 의혹을 듣던 목감 슈퍼라는 작은 마트와, 도로 변 길거리에서 채소류를 팔던 아주머니, 할머니들, 한두개의 정육점, 확성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과일 트럭들로 형성되었다.

목감동은 행정적으론 시흥시에 속해있으나 시흥시는 가로로 길게 찢어진 치킨텐더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목감동은 그곳의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시흥시의 상업지대 보다는 안양, 그리고 안양일번가 쪽이 거리로서도, 교통편으로서도 더 가까운 환경이였다. 따라서 명절, 손님 맞이, 제사 등의 중요한 일정이 있으면,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대리고 안양 일번가 근처에 위치한 중앙 시장과 2001 아울렛을 방문했었다. 당시에는 안양을 나가는 교통편이 크게 31-7번, 32번, 35번 3개의 노선이였고, 넉넉하지 못한 상황인지라 좌석버스였던 350번 버스는 항상 논 외였다. 당시 모든 버스들은 배차 간격이 길었고, 그나마 짧았던 31-7번 버스가 우리와 안양을 이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31-7번 버스는 우리를 외부와 연결 해주는 유일하고 저렴한 수단이였고, 이는 다른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으나 당시의 노선은 시흥의 삼미시장에서 안양 – 군포에 이르는 노선이였고, 시흥시 동부에 사는 사람이 좀더 번화한 안양 일번가 쪽이나, 안양역을 통해 서울에 가고 싶다면 유일한 방법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버스는 하루 언제든 탑승을 하던 항상 사람이 많고, 무겁고 담배 섞인 냄새가 났다. 유치원을 다니거나,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의 나이였던 나에게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고 두 살 어린 동생에게는 더욱 힘든 환경이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의 눈물과 투정이 잔뜩 고인 눈을 보면서, 시장에서 통닭을 사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에 안양까지의 여정을 오롯이 참을 수 있었고, 동생은 참으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다.

안양에 도착해서 어머니는 우선 시장을 한바퀴 돌았다. 수많은 사람들, 바닥에 고여있는 비린내 나는 구정물, 경적 소리와 매연을 내뿜던 스쿠터들, 무언갈 옮기던 짐꾼들, 좌판에 놓여있는 돼지 머리들, 갈색의 다라이에 담겨있던 곡류와 채소류 등 여전히 내겐 힘든 여정이였고, 시장의 탐색이 끝나면 다음은 2001 아울렛의 지하에 있는 식료품 점을 향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곳에서 품질 대비 시장보다 가격이 싼 상품을 구매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시장에서 가격이 싼 상품을 구하기 위해 다시 시장으로 향했다.

이제 아이의 인내심은 박살이 났다. 동생은 이미 집에가자며 보챈지 한시간이 지났고, 나 또한 바닥의 구정물을 몸에 끼얹는 것과 계속 재미없게 어머니를 따라 다니는 것의 사이에서 이득을 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때쯤 통닭집에 간다고 하셨다. 나는 좀더 참을 수 있었고, 동생을 격려 할수 있었다. 조금 어른스러울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후 시장을 두 세바퀴 더 도셨고, 이후 우리를 돌아보시고는 입술을 달싹이시다가, 곧 아무 말 없이 시장 통닭집을 향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2001 아울렛의 더 저렴한 상품을 생각하셨을것 같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임을 깨닫고는 오늘은 여기까지라 생각 하셨던것 같다.

주 거래는 어머니가 하셨기에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른다. 통닭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후라이트 치킨처럼 손질하고 치킨처럼 절단한 닭을 밀가루를 뭍혀 튀긴 닭이였다. 통닭 집에서는 그것을 기름이 비치는 종이 포장지와 그것을 담은 검은 봉다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습기가 차고,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나던 봉다리를 내게 넘겨주셨다.

“아빠랑 같이 먹자.”란 말씀에 나는 좀더 참을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 치킨을 사면 통닭집에서 닭모래집 튀김을 한줌정도 서비스로 따로 담아 주었던것 같다. 절약이 몸에 베인 어머니가 그것을 따로 주문 했을리는 없으리란 확신이 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 몰래 근위 튀김을 한개 꺼내 먹었고(지금 와서 생각 해보면 내가 그것을 꺼내먹는 걸 어머니가 몰랐을 리 없다. 나 또한 눈치를 보느라 닭 모래집 튀김을 꺼냈을 것이고, 어머니는 그것을 알기에 모른척 하셨을거다.), 다시 한개 꺼내 동생 입에 물려주었다. 동생과 나는 같이 비밀을 공유했고 그렇기에 우리는 일시적인 평화를 이룰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안양까지 오는 것의 역순의 +a 였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정말 고역이였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항상 빡빡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엔 막걸리 냄새, 안양에서 마주친 친한 사람들의 수다스런 목소리, 온갖 음식물의 냄새, 기묘한 비린내, 덜컹거리는 버스, 간신히 잡은 엄마의 옷 혹은 기둥, 혹시나 놓칠까봐 강하게 움켜쥔 동생의 상완, 그럼에도 놓치지 못한 고소한 냄새가 나던 검은 봉다리, 이젠 진짜 끝장이였다. 아마도 어머니 또한 지쳤겠지만, 우리의 울보가 언제 터질 지 몰라 노심초사 하셨을 것이고, 마음을 다잡지 않으셨을까 한다.

내리는 정류장에서 봉다리의 따뜻함은 이제 거의 차가움에 가까웠다. 동생은 이때쯤 잠들어서 어머니 등에 업혀있고 나는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는 곧 먹을 치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봉다리에서 참을 수 없이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빨리 먹고싶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작은 안도감 이였다.

나는 통닭을 열심히 먹었다. 동생은 피곤에 잠들어서 가족이 같이 치킨 먹을때를 놓쳤고, 이후 잠에서 깬 뒤 식은 닭 몇조각을 먹으면서 자신을 안깨우고 뭐했냐며, 자기만 빼놓고 먹었다며 목놓아 울었다.

물론 같은 시기에 목감동에는 형제 영양, 무슨 영양 등의 이름으로 통닭집존재 하긴 했지만, 당시 집 사정이 그리 좋진 않았단 기억과, 멀리 장을 보러 간 어머니의 노력, 아낀 돈으로 으로 자식들 통닭을 사주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용인 했다는 복잡한 상황이 있었다.

이 기억은 2-3년 정도 유지 된다. 이후엔 어머니가 동생을 잘 보라며 말씀하시고는 혼자 안양을 다녀 오셨다. 그 이후 동생 혼자 집에 있어도 될 때쯤엔 짐꾼이 필요 하다며 나만 대려가셨다. 모든 일의 끝에는 고소한 통닭이 있었고, 나는 어른스럽게 참을 수 있었다.

이 시기와 비슷하게 목감동에는 임스치킨, 멕시칸 치킨, 페리카나 치킨 점포가 생겼고, 통닭 먹으러 가자는 어머니의 꼬득임은 날로 힘을 잃었다. 대신 시장을 같이 갔다 오면 치킨을 시켜준다는 새로운 보상이 생겼다. 나는 못이기는 척 어머니와 안양을 다녀왔다. 가끔 도나쓰도 사주셨다.

2~3년 정도 뒤 우리의 치킨은 집 앞에 생긴 BBQ 치킨이 책임졌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그곳의 치킨은 어느 곳과 비교해도 정말 맛있었다. 이후 익스트라 버진 올리브오일 후라이드 치킨으로 변경 되었을때, 비싸진 치킨 가격에 시킬지 말지 고민을 하던 우리가 생각난다. 목감동에 있던 페리카나 치킨을 한번 시켜보고는 우리는 다시 별다른 논의 없이 다시 BBQ 치킨을 시켰다. 내가 군대를 다녀온 전후에 양념치킨이 너무 맛없게 바뀌기 전까진 우리의 특별한 음식이였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별 다른 일이 없는 한 외식은 거의 하지 않았다. 가끔 아버지가 소래포구가 회가 싸다며 우리를 대려간 것과, 집 근처에서 삼겹살을 먹을때를 제외하면 한달에 한두번,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저녁에 치킨을 시켜먹었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부모님이 섭섭해 하실거다. 외식을 아예 안하진 않았다. 치킨만 시켜먹은 것도 아니다. 부모님과 부모님 친구를 따라 동네 호프집도 갔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모든시절을 관통한 외식-배달음식은 치킨이였다.

요즘엔 본가에서 치킨을 시켜먹을 땐 BHC치킨에서 치킨을 시켜먹는다. 우리 가족 기준에선 가장 맛있고, 어릴때 먹었던 BBQ 치킨과 가장 비슷한 맛이 나기 때문-이는 모든 가족의 합의-이다.

나는 경험과 재미를 위해 새로운 맛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고향 같은 맛을 같이 추구한다. 치킨은 나를 유년시절로 보내준다. 빡빡한 버스는 힘들었지만 엄마랑 있어서 좋았다. 내가 동생을 책임지고 있는 남자라서 좋았다. 눈이 하얗게 뜬 생선은 신기했다. 7단으로 쌓여있던 밀대의 짐은 대단했다. 오징어젓을 맛보던 어머니의 작은 손이 지나간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치킨은 내게 여전히 중요한 음식이였다. 프라이드 치킨은 아니였지만, 닭날다의 케찹맛이 나던 치킨과 반합에 담기던 레드락 맥주, 좋은일이 있을때면 선배들이 가끔 대려가던 봉추찜닭-이곳에서는 소주로 낮술을 종종 했다. 다시 생각 해봐도 홍대는 치킨들의 각축장이였다. 마치 춘추 전국시대 같았다. 브랜드 치킨집은 잘 가진 않았다. 영세 술집들은 카레치킨을 주력으로 팔았다. 기억나는게 레게치킨, 옥상달빛의 감자튀김이 많던 치킨. 영세 배달 치킨집은 파닭을 주력으로 팔았다. 치킨과 알싸한 파채의 조합은 소주 안주로도 맥주 안주로도 야작과 함께하는 식사 대용으로도 훌륭했다. 대학 졸업 즘 해서는 근처에 노랑통닭이 생겼다. 짐승같은 남자 셋이 가서 치킨을 배터지게 먹고도 치킨이 남았고 술도 얼큰하게 취해서 나왔던 기억이 선명하다.

살면서 좋은일도 있었고 나쁜일도 있었다. 하지만 치킨을 먹을때 만큼은 즐거웠던것 같다. 최소한 나쁘진 않았다.

이제 나는 가끔 삶이 힘들거나, 지치거나, 모노톤으로 변할 때, 혹은 오늘을 좀 걱정없이 보내고 싶을 때 치킨을 시킨다. 기억은 퇴색되었고 치킨 맛도 변했지만, 치킨은 나를 즐거웠던 그 때로 보내준다. 혹은 그 때의 즐거운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소개팅 녀에게 첫 전화를 걸 때 느꼇던 설램은 치킨을 시킬때 아직 유효하다.

인간의 기억은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인간은 감각기로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기 때문에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등으로 경험으로서 우선 수용하고 그것에 언어로서 설명, 인덱스를 붙인다는 식이다. 이 글은 학술적인 글이 아니니 너무 엄격히 생각치는 마시라.

이 중 미각은 우리를 그때, 그곳으로 확실하게 보내준다. 맛있다의 개념은 아니다. 할머니가 해주시던 불어터진 싱거운 라면, 쓴맛만 나던 엄마몰래 집에서 만든 달고나, 문방구 오락기에서 나오던 정체를 알수없던 과자, 서울역 맥도날드에서 먹던 밀크쉐이크, 문방구 제비뽑기에서 먹던 젤리와 사탕 중간의 맛이 있던 카라멜, 밀가루가 가득했던 학교앞 닭강정, 재수할때 매일 먹었던 눈물폭탄맛 닭튀김꼬치, 홍대 앞의 맛이 더럽게 없던 튀김 족발 등등등.

그리운 맛이고, 이 맛은 우리를 그리운 순간으로 보내준다. 물론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겠지만, 지나고 보니 괜찮았던 그 순간으로. 싱거웠던 라면은 할머니의 손주사랑으로, 달고나는 어린나이의 짜릿한 일탈로, 이상한 과자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던 우리의 혈투를, 밀크쉐이크는 고된 따뜻함을, 친구와 닭강정을 나눠먹던 기억, 눈물이 나는게 이상한것이 아니였을 닭꼬치 맛, 맛이 없어서 우리가 더 재미있었던 튀긴 족발.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의 부재로 고통받고 있고,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되는건 없고 쓰라리다. 하지만 치킨은 나를 위로한다. 나쁜일만 있던건 아니였다. 그럼 앞으로도 나쁘기만 하진 않겠지, 꺼져가는 작은 불씨가 다시 깜박거린다.

소울푸드란 이런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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